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문단 편집) === [[니카라과 혁명]]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니카라과 혁명)]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란-콘트라 사건)]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 중앙아메리카의 미국 세력권 안에서 폭력과 압제를 일삼던 전통적인 정권이 교회와 여타 불순세력들의 도전을 받았을 때, 레이건 정부는 1981년 대통령 취임 직후에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이 되었고, 곧 세계의 다른 몇몇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가운데 한 나라인 니카라과에서 미국은 지역주민을 전통적으로 제압했전 정부군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이는 윌슨적 이상주의의 쓰라린 유산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이 지원한 소모사 독재정권이 산디니스타 반군에게 전복되었고, 잔인한 정부군인 국가수비대는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니카라과는 국제 테러 박멸 운동의 대상이 되었고 국토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미국 주도의 테러 전쟁은 그 심리적 영향 역시 강력하다. 암울한 역사가 마침내 진로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초강대국의 개입으로 좌절됨으로써, 독재정권 전복에 뒤이은 활력이 넘치는 정신과 낙관주의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 > 패권인가 생존인가 p.16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니카라과]]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니카라과의 주요 강들은 중부 산악지대에서 시작되는데 서쪽으로는 태평양이나 마나과호, 니카라과호로 흘러들며 동부의 강들은 [[카리브해]]로 연결된다. 즉 니카라과는 마나과호와 니카라과호를 통해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자연히 니카라과는 영국과 미국의 관심과 개입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서부의 자유주의 정부와 동부의 보수주의 세력으로 나누어 내전을 치루던 니카라과는 1912년 아돌포 디아스(Adolfo Díaz)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미국의 개입으로 내전이 종식되었다. 미국은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다. 니카라과가 안정화된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미국이 니카라과의 내정에 깊숙히 개입하는 과정에서 니카라과인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미군의 개입과 소모사 정권에 맞서 투쟁한 [[산디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본래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온두라스와 과테말라에 있는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에서 일했었다. > 1925년 무렵 나는 니카라과의 모든 것이 불모화되고 조국의 명예는 사라져버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매일 우리 동지들은 무력으로 니카라과를 점령한 미제국주의자의 침탈에 짓밟힌 우리의 민중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친구들에게 만일 나와 함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동지가 100명만 있다면 우리나라의 주권은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 > 리우스 지음, 편집부 옮김,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 오월, 1988, p.49 1926년 5월 16일 산디노는 직장을 그만구도 저축해놓은 돈 3,000불을 지니고, 동지 100명을 찾아 니카라과로 갔다. 그렇게 해서 그가 처음 모은 동지는 29명의 광부였고, 여기서 미국에 맞선 무장투쟁을 진행했다. 산디노는 1927년부터 게릴라들을 지휘하며 미 해병대에 맞서 싸웠다. 29명으로 시작한 산디노의 부대는 이후 30정의 총과 6,000개의 탄약통을 회수했고, 미국에게 협력한 니카라과 군참모장 몬카다에게 회의를 느낀 그의 휘하 군인 200명이 산디노 부대에 합류했다. 그렇게 해서 산디노의 부대는 수백 명으로 수가 증가했다. 산디노의 부대가 게릴라들을 모아 저항하자, 미군은 전투기 편대를 보내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다. 리우스의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에 따르면,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폭격으로 부녀자들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폭격 당한 마을에서 최소 3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서 산디노 부대는 퇴각했고, 이 폭격 임무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은 당시 미국의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했던 브라이언 윌슨(S Brian Wilson)[* 참전 이후 반전운동을 전개했으며, 1980년대 이란-콘트라 스캔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이 니카라과로 보내는 물자를 막기 위해 반전시위를 하다가 두 다리를 잃었다. 현재도 미국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몇권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에 따르면, 1927년 11월 27일 미 해병대가 동원한 전투기 폭격으로 한 마을에서 32명의 여성과 11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도합 43명이 죽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http://www.brianwillson.com/record-of-us-bombings/|참고자료]][* 브라이언 윌슨이 현재 운용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다.] 미군의 개입하자 최소 800명 이상이 넘었던 산디노의 부대는 후퇴를 거듭했다. 1927년 엘오코탈에서 패배한 산디노의 부대는 산페르난도에서의 전투에서도 연이어 패주했으며, 1927년 6월 27일, 라스플로레스 전투에서 또 다시 참담한 패배를 맞보았다. 라스플로레스 전투에서만 최소 70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산디노는 엘치포테로 퇴각하고, 그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여 니카라과의 지형지세와 농민군에게 알맞는 새로운 전투방식을 도입했다. 바로 게릴라전이다. 북부 니카라과의 세고비아 지방에서는 친미정부의 억압에 반대하여 마을 주민들이 산디노의 부대를 지켜주었으며, 그 지역 농민들 또한 산디노의 게릴라 부대에 들어가 싸우기도 했다. 전쟁 초기 산디노의 부대가 미군과 친미정부군에게 밀렸던 것은 항공폭격을 동원한 막강한 화력과 군사력 때문이었다. 미국은 다시 해병대를 파병하여 1933년까지 주둔하면서 실질적으로 점령과 통치를 계속하였다. 친미 정권인 아돌포 디아스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나, 아돌포 디아스 정권은 그리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정권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소모사가 쿠데타로 대통령 직을 차지하게 되며, 철권 통치를 이어나갔다. 1970년대 당시 소모사 일가의 재산은 대략 5~10억 달러였다. 니카라과의 경제 자체는 소모사 정권의 독재로 인한 정치안정과 미국 기업들의 니카라과 투자로 지속적으로 성장했지만[* 니카라과 경제는 양극화가 문제였지 극빈국은 아니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내전으로 막장이 되기 전 1977년 1인당 GDP가 737달러였는데 당시 중상위소득국가(UMIC)의 1인당 GDP가 697달러였다.] 동시에 소모사 정권은 족벌정치와 부정부패,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비판받았다. 급성장하는 경제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의 인구성장률이 매우 높았으므로 노동시장이 공급되는 노동인력을 다 흡수하지 못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점진적으로 상승하여 1977년 13%에 달했다.[* The End And The Beginning: The Nicaraguan Revolution(2019), John A. Booth, Routledge; 1st edition] 실업률 증가는 당시 노동자가 부양해야 했던 가족 수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문제로 다가왔다. 수도 마나과 근교에는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이주민들이 사는 거대한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1977년 문맹률은 42%, 기대수명은 56세(세계은행 추산), 유아사망률은 1000명당 130.22명(UN IGME 추산)에 달했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런 지표들이 비참한 수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개선은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장 유아사망률도 1955년 207.99명에서 낮아진 것이다. 1959년에 성공한 쿠바 혁명에 영향을 받아 니카라과의 각계각층의 민중들은 1958년에서 1960년 사이에 최소 60회 이상의 무장봉기를 감행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봉기는 소모사 정부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반소모사 투쟁을 주도한 것은 반독재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학생운동이었는데, 이들은 현실적으로 소모사 체제의 대체세력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으며, 니카라과 보수주의 세력과의 타협으로 인한 소모사 체제의 상대적 안정과 소모사 정권의 탄압 등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범준 외 지음, 사회주의 실험: 쿠바와 니카라과, 인간사랑, 1992, p.185] 위에서 언급한 파업과 더불어 1950년대 후반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은 니카라과의 학생운동에 영향을 줬다. 민중들의 무장봉기 조직들은 초기엔 조직이 허술하고 무기가 취약하여 국가방위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1961년 산발적인 소규모 무장봉기 조직들의 취약성을 깨달은 폰세카(Fonseca)와 보르헤(Borge)가 주축이 되어 대대적인 게릴라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라는 혁명 조직이었다. 베트남 전쟁 초기 응오딘지엠 정부의 독재와 학살에 맞서 자생적으로 무장봉기 노선을 걸었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처럼 이들도 산디니스타 내부(특히 농촌지역)에 해방구 및 기지를 두며 소모사 정권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은 20여 차례에 걸쳐 무장투쟁을 감행했다. 이들을 탄압하려는 소모사 정부의 통치는 아주 잔인했다. 대표적으로 1967년 1월 22일에는 마나과 중심가에서 소모사 세습 정권의 선거결과 조작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방위군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200여 명의 시위대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학살을 1월 22일 학살(Masacre del 22 de enero)이라고 한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특징은 농촌과 해방구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비밀리에 조직을 확대해나갔으며, 197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였다는 점이다.[* 임승수,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시대의 창, 2008 p.109~110] 그리고 조직을 재정비하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하여 장기 인민투쟁(Guerra Popular Prolongada; GPP) 전략을 세웠다. 농민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력계급으로 보고 농민에 대한 정치교육을 통해 장기적으로 무장투쟁의 역량을 증진시키며, 게릴라 조직을 확충하고 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니카라과 북부 산악지방 등 농촌 배후지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도시와 농촌에서 상당한 조직기반을 구축하는 등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나 소모사 체제의 부패와 무능이 폭로된 1972년 마나과 대지진과 1973년의 경제위기는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에게 정치활동을 벌여나가기 좋은 기회였다.[* 이범준 외 지음, 사회주의 실험: 쿠바와 니카라과, 인간사랑, 1992, p.186] 1970년대 들어서 교회, 군부, 지주 등 체제 내의 분열과 마나과 지진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파괴, 인명 손실 등으로 인하여 ~~북한의 3대 세습 이전~~ 3대에 걸친 소모사 족벌 체제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혁명적 무장투쟁을 해오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43년간 3대 세습을 거쳐 해오던 소모사 철권통치는 막을 내렸다. 좌익 혁명 세력인 산디니스타를 비롯해 자유주의 우파까지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봉기하였으며, 쿠바 혁명과 함께 성공한 유이한 무장혁명이다. 내전 기간의 희생은 극심했다.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내전을 통틀어 최소 4만 명 이상 사망하고, 가옥 20만 채가 파괴되었다. 고아는 4만 명이 넘었고, 75만 명이 기아상태였으며, 1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외채는 16억 달러에 달했고 국내 산업의 1/3이 파괴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니카라과의 열악한 현실은 산디니스타가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게 됐다. 초기 산디니스타 정권은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단행된 토지개혁을 통해 대략 7만 명의 농부들과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산디니스다 정권은 소모사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 했던 의료복지를 늘리고자 의료시설을 설립했고,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소모사 독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1979년 7월 20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혁명 평의회는 포고 3호를 발하여 소모사 가족, 국가방위군의 고위 지휘관 및 정부 고위 관료들의 소유 재산을 몰수하였고, 동년 8월 8일에 개정 보완되어 공포된 포고 제38호에 의하여 소모사 독재정권에 협력한 자의 기업이나 사유재산의 소유권 이전 또는 점유 등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1979년 11월 23일에는 1,500개의 플랜테이션 약 80만 핵타르의 농결지를 무상몰수 했다.[* 정명기, 니카라과 혁명사, 한마당, 1986 p.190] 하지만 산디니스타 정권은 상당수 원주민의 주권을 무시하는 정책을 펴서 이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물론 미국은 카터 정부 시기부터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했으며, 산디니스타 정권은 이들과 미국이 지원한 세력의 연합체인 콘트라와 오랜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무기 대금을 지원함으로써, 이란-콘트라 스캔들을 터뜨리기도 했다. 사실 레이건이 이러한 전복 및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은 당시 그가 추진하던 반공주의적 정책에 있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하워드 진]]의 저서 <미국 민중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 레이건은 대중적인 산디니스타 운동이 미국이 오랫동안 지지해온 부패한 소모사 왕조를 전복시킨 니카라과 혁명 직후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맑스주의자들과 좌익 사제들, 여러 부류의 민족주의자들의 연합인 산디니스타는 농민들에게 더 많은 땅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과 의료를 제공하는 데 착수했다. 이를 '공산주의'의 위협이라고 본, 아니 더욱 중요하게는 중앙아메리카 각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오랜 지배에 대한 도전이라고 본 레이건 행정부는 즉시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레이건 정부는 중앙 정보국을 동원, 소모사 치하에서 악명높은 국가방위군 지도자를 지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반혁명군(콘트라 반군)을 조직함으로써 은밀한 전쟁을 벌였다. >---- > 미국 민중사 2 p.401 심지어 로널드 레이건은 콘트라 반군에 대해 '''도덕적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 동급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비교를 하기도 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콘트라 반군은 소모사 치하에 있던 이들의 잔존 세력이었고, 1980년대 내내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가며 테러와 사보타주를 자행했다. 대중적인 지지를 못받았기에 니카라과 내부에 근거지를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미국이 지배하는 아주 가난한 나라 온두라스에 근거지를 두며 활동했다. 이들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농장과 마을을 습격하고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을 살해하는 등 잔학행위를 벌였다. 이들의 공작과 소련에서의 지원이 줄어듬에 따라 산디니스타 정부는 1990년 선거에서 패배하게 됨에 따라 다시 물러나게 됐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백색테러는 끔찍했고, 이들의 정치 공작또한 극심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 레이건 대통령의 니카라과에 대한 간섭은 내란을 조장하고 국가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레이건은 의회의 예산을 빼돌려 니카라과에 보낼 군사자금으로 사용했고, 4만 명의 니카라과 민중들을 희생시켰으며, 니카라과의 50년 동안의 무역 수출액에 버금가는 170억 달러의 경제 손실을 입혔다. 미국의 끊임없는 니카라과 침공 위협은 산디니스타 정권이 짊어지고 가야 했던 또 다른 짐이었다. 국제재판소에서는 미국에 대해 니카라과의 항구, 기타 제반시설은 물론이고 광산 등을 파괴한 테러리즘에 대해 책임을 물었지만, 미국은 민중들의 의지와 힘으로 세워진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 >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p.113 즉 이러한 상황속에서 1990년 선거를 치렀고, 13개의 우익정당이 합당하여 이루어진 친미정당 우노(UNO)에게 2만 표의 차이로 패배하며, 16년 동안 자취를 감췄다. 그러던 2007년 산디니스타 혁명정부가 또 다시 집권했다. 놀랍게도 선거를 통해서 집권했다. 아무튼 현재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쪽 정치인인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현재 산디니스타는 다소 보수화 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산디니스타는 현재 많이 우경화되어 낙태를 불법화 하는 것에 동조하고, 다니엘 오르테가가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며 표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비범죄화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